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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자치고 아름다운 풍광을 가지지 않은 곳이 있을까마는, 강원도 동해안 지역의 정자들은 산과 강, 바다를 두루 즐길 수 있어서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지금은 예전과 지형이 달라져서 정자가 건립되던 당시의 풍광을 그대로 감상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졌지만, 여전히 이들 정자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해서 우리에게 깊은 휴식과 위로를 건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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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차들이 지나다니는 도로 옆에 있는 해운정 역시 마찬가지다. 조선 중기의 이름난 관리이자 뛰어난 시인이었던 어촌(漁村) 심언광(沈彦光: 1487~1540)이 정자를 지었던 1530년(중종25)에는 그 앞으로 드넓은 경포호가 펼쳐져 있었고, 멀리 솔숲 너머로는 끝을 알 수 없는 바다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고요하고 한적한 마을은 번우한 세속에 지친 한 인간의 마음을 편안하게 위로할 수 있었다. 정자를 건립할 당시 강원도관찰사로 제수되어 근무하던 심언광은 자신의 고향 강릉 경포호반에 날아갈 듯 멋진 건물을 짓고 해운정이라고 명명하였다. 어쩌면 자신이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게 되면 아내와 함께 만년을 보낼 요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이 어찌 뜻대로 되겠는가. 그가 정치적인 문제로 고초를 겪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해운정에서 노년을 지낼 때 그의 아내는 이미 불귀의 객이 되어 그 시간을 함께할 수 없었다. 강릉으로 돌아와서 경포호반에 있는 집에서 머물며 지은 시가 몇 편 전한다. 해운정을 정확하게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아마 해운정을 중심으로 지어진 고향집에서 지내는 마음을 읊은 것으로 보이는 작품을 한 편 보기로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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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집’, ‘은거자의 집’ 등을 통해서 심언광은 자신의 거처를 속세와 떨어진 곳에 소박한 모습으로 위치시킨다. 사람들의 발길은 닿지 않지만, 자연의 삼라만상은 언제든지 자신의 집과 소통한다. 낮은 담장으로 언제든지 드나드는 구름, 고요한 창으로 엿보는 달빛, 대나무 숲과 여라 덩굴 등은 그러한 것을 의미한다. 자연의 운행에 삶을 맡기고 살아가는 심언광에게 오직 할 일은 시를 읊조리는 것이다. 해운정의 모습이 워낙 빼어나기도 하지만, 이 정자가 조선의 선비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명나라 사신인 공용경(龔用卿: 1500 ~ 1563)과 오희맹(吳希孟: 1508~?)의 친필 현판 및 그들이 지은 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가 급격히 몰락하다가 결국 만주족의 나라인 청나라에게 멸망하자 조선의 선비들은 북벌(北伐) 의지를 굳게 다진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북벌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명나라에 대한 그리움 혹은 그들을 도와서 명나라가 다시 서게 해주어야 한다면서 결의를 다졌다. 이러한 분위기는 표면적으로나마 조선이 망할 때까지 계속 이어지면서 조선의 선비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명나라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은 선비들에게 하나의 성지처럼 여겨지거나 혹은 발길을 한 번쯤은 해보고 싶은 곳으로 만들었다. 해운정은 이러한 조건에 완벽히 부합하는 곳이었다. 경포를 중심으로 강원도 영동 지역 풍광의 가장 정수라 할 만한 곳에 해운정이 위치해 있으면서도 명나라 사신들의 친필이 남아있는 곳이니, 이곳을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러보고 싶지 않았겠는가. 공용경(龔用卿: 1500 ~ 1563)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명나라 복건(福建) 회안(懷安) 사람으로 자는 명치(鳴治), 호는 운강(雲岡)이다. 1526년(가정5)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이후 한림원에서 14년 동안 근무하였다. 1540년(가정22) 남경(南京) 국자감(國子監) 좨주(祭酒)가 되었으나 1542년 뇌물 혐의로 무고되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599년(가정38) 복건 지역에 왜구가 침략하자 향군을 조직하여 물리치기도 했다. 저서로 『운강선고(雲崗選稿)』, 『금릉고성균집(金陵稿成均集)』, 『사조선록(使朝鮮錄)』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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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오희맹(吳希孟: 1508~?)은 중국 상주부(常州府) 무진현(武進縣) 사람으로 자는 자순(子醇), 호는 용진(龍津)이다. 1532년 진사시에 급제한 이래 여러 벼슬을 지내다가 공용경이 조선에 사신으로 파견될 때 부사(副使) 자격으로 함께 왔던 사람이다. 공용경은 오희맹과 함께 1536년(중종31) 11월 하순, 명나라의 황태자가 태어난 것을 알리기 위해 ‘반황태자조사(頒皇太子詔使)’로 조선에 파견되었다. 정사(正使)는 한림원수찬관(翰林院修撰官) 공용경, 부사(副使)는 호부급사중(戶部給事中) 오희맹(吳希孟)이었고, 원접사(遠接使)로는 당시 형조판서(刑曹判書) 정사룡(鄭士龍)이었다. 이들은 11월 하순 북경을 출발하여 이듬해인 1537년 2월 20일 압록강을 넘어 조선으로 들어왔다. 공용경은 명나라로 돌아간 뒤 자신이 사신으로 다녀가는 동안 지은 시문을 모아서 『사조선록(使朝鮮錄)』을 편찬하였다. 조선에서도 이들이 지은 시문을 『황화집(皇華集)』(권18~권22)에 수습하였는데, 이 작품은 ‘권18’에 수록되어 있다. 공용경(龔用卿)의 글씨는 강릉 해운정(海雲亭)에 한 점 남아있다. ‘경호어촌(鏡湖漁村)’이라고 대자(大字)로, ‘흠차정사(欽差正使) 운강(雲崗) 공용경(龔用卿) 서(書)’라고 소자(小字)로 써놓은 현판이다. 함께 부사로 왔던 오희맹 역시 ‘해운소정(海雲小亭)’이라는 현판 글씨를 남겼다. 이들은 해운정을 경영했던 심언광(沈彦光)과 관련이 있다. 공용경 일행이 사신으로 왔을 때 심언광은 이조판서 자격으로 접대를 했고, 함께 차운시를 짓기도 했다. 이 때 지은 차운시의 일부가 심언광의 문집 『어촌집』에 수록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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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공용경이 지은 시는 어떤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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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언광의 기록에 의하면 이 작품은 공용경이 비단부채에 써서 준 작품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심언광은 당시 이조판서를 지내면서 동시에 사신을 접대하는 관반(館伴)이었다. 따라서 공식적인 외교 행사가 있거나 혹은 명나라 사신들을 접대할 때에는 함께 다니면서 시를 주고받는 일이 많았다. 이때 심언광은 이미 경포호반에 해운정을 지어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명나라 사신들에게 부탁하여 현판 글씨를 받은 것이다. 또한 이 시기에 공용경에게 시를 받은 것이다. 공용경의 시를 보면 심언광이 해운정으로 낙향하리라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포를 연상시키는 앞부분의 풍경 묘사라든지 강문어화(江門漁火)를 연상시키는 중간 부분의 묘사는 심언광이 공용경에게 해운정의 풍광을 자세히 이야기해 준 것이라 추정된다. 특히 ‘갈매기를 마주한 늙은이’는 속세를 완전히 떠나서 자연과 물아일체의 경지로 살아가는 은거자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이는 심언광의 만년을 정확하게 그려낸 것이라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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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조선 시대 문인학자들의 발길을 끌게 된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바로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시가 걸려있다. 북벌론의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었던 송시열은 조선 후기 노론의 영수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고, 끝내는 귀양을 가는 도중 사약을 받아 세상을 떠난다. 그는 심언광의 후손이 보여주는 공용경의 시를 읽고 거기에 차운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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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용경이 조선에 사신으로 다녀간 지 150년이나 지난 뒤 조선 땅에 사는 쇠약한 한 늙은이가 다시는 보지 못할 명나라의 사신을 생각하면서 시를 짓는다고 했다. 이때는 이미 명나라는 완전히 멸망하고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했을 때이다.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것에 보답하고 명나라 문화를 되살리기 위해서 조선이 해야 할 일은 청나라를 물리치고 중원 땅에 다시 명나라가 서도록 돕는 것이 자신들의 임무라고 생각했던 송시열 입장에서는 명나라 사신들의 친필과 시는 새삼스럽게 다가왔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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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정에 걸려있는 현판을 보면서 ‘저홍(渚鴻)’의 시를 읊게 한다고 했다. 이 단어는 『시경』 <빈풍(豳風)>에 나오는 구절에서 용사한 것인데, 일반적으로 사신으로서의 임무를 마치고 조정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뜻한다. 명나라와 조선 사이의 교유가 해운정의 공용경 글씨를 통해서 이어지고 있음을 기뻐하는 송시열의 마음은 이제는 사라진 ‘중화(中華)’ 문명의 흔적을 찾을 수 있기에 더욱 기뻤을 것이다. 송시열이 공용경의 시에 차운을 한 뒤, 조선의 많은 후학들이 이 시에 다시 차운을 하였다. 어떤 사람은 공용경의 시에, 어떤 사람은 송시열의 시에 차운했지만, 그렇게 시를 짓는 사람들의 마음은 대부분 명나라에 대한 회고의 감정과 중화문명의 흔적을 찾는 마음이 문학적 바탕으로 작용하였다. 채지홍(蔡之洪: 1683~1741)의 작품을 한 편 더 보도록 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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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의 앞부분에서는 속세와 떨어져서 청정한 공간이라는 점, 파도와 일출을 볼 수 있는 장엄한 풍경을 노래했다. 뒷부분에서는 명나라 사신의 시문과 필적이 남아있다는 점을 이야기한 뒤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 및 문화적 교류를 그리워하고 있다. 이처럼 해운정에는 공용경과 오희맹, 이들의 뒤를 이어 차운한 송시열의 현판 글씨와 시가 남아있어서 조선의 선비들에게는 중요한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조선 후기에도 공용경의 시에 차운하는 전통은 꾸준히 이어진다. 심언광이 정치적으로 처벌을 받은 것이 훗날 복권이 되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 이민서(李敏敍: 1633 ~ 1688)의 작품도 있다. 그의 기록에 의하면 심언광이 세상을 떠난 지 백년 만에 임금에 의해 사면이 되어 벼슬이 회복된다. 이에 그의 손자 심징(沈澂)을 위해 이민서가 쓴 작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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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언광이 김안로(金安老: 1481~1537)를 등용했지만 후에 사이가 나빠진 사실은 널리 알려져있다. 김안로의 전횡을 보면서 심언광은 그의 천거를 후회했으며, 이조판서로 재임 중에 김안로의 비행을 비난하다가 함경도관찰사로 좌천되기도 했다. 그가 죽은 뒤 인종이 즉위하여 대윤(大尹)이 집권하면서 향배가 바르지 않다고 탄핵을 받아 삭탈관직되었다가 1684년에 직첩이 환급되었고, 1761년(영조37)에 문공(文恭)의 시호를 받았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할 때 이민서의 작품은 1684년 무렵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빼어난 글귀는 전하는데 신선의 종적은 눈을 밟은 기러기라고 표현한 것은 심언광의 시문은 전하지만 그의 자취는 찾아볼 데 없다는 의미다. 이 작품은 공용경 시의 운자만을 빌렸을 뿐 내용은 심언광의 복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서, 해운정의 풍광을 읊은 다른 작품과는 비교가 된다. 물론 해운정이 오직 명나라 사신의 흔적만으로 이름이 났던 것은 아니다. 이곳에는 심언광의 한 세대 후배쯤 되는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가 시를 남겼으며, 호해정을 전국적인 명소로 만들었던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이 시를 남겼다. 먼저 이이의 작품을 보기로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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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는 이곳에서 해운정 주인과 술자리를 함께하고 있다. 멀리 보이는 바다에는 해무(海霧)가 막 걷혀서 푸르고, 집 뒤에서 들리는 솔바람 소리는 한여름 더위도 물리친다. 주인과 손님이 어울려서 좋은 풍광 속에서 풍류를 즐기는 모습은 세상의 번뇌를 모두 벗어나 자연 속에서 한가로움을 만끽하는 듯하다. 이와 함께 이이의 절친한 벗이었던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 역시 해운정에서 시를 지은 바 있다. 두 수의 연작시인데, 다음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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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의 시는 해운정에 앉아서 하늘의 달을 기다리고 있는 시간을 노래하고 있다. 경포 주변의 정자는 대체로 도가적 상상력과 결합하면서 정자가 있는 공간을 신선세계로 전환시키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 작품은 바로 그러한 경향으로 지어졌다. 해운정과 관련한 시를 전반적으로 살펴보면 공용경의 이미지가 강한 탓인지 노년에 은거하여 살아가는 삶을 노래하는 것이 많다. 그러나 정철은 자신의 문학적 장기라고 할 수 있는 도가적 상상력에 의한 신선계로의 전환이라는 구도를 잘 살려서 해운정의 풍광을 노래한다. 2수로 되어 있는 이 작품 중에 첫 번째 수에서는 술을 앞에 놓고 하늘 한가운데 달이 환하게 밝아오는 순간을 포착한다. 두 번째 수에서는 신선을 만날 수 없고 자신의 앞에 놓은 아득한 길을 떠올리는 순간을 노래했다. 여기서 ‘바다로 가는 길’을 뜻하는 ‘영해로(瀛海路)는 큰 바다로 가는 길이라는 일차적인 의미 외에도 강릉으로 가는 길을 뜻하는 이차적인 의미를 중첩시킴으로써 정철 자신이 걸어가야 할 물리적 길과 함께 자신의 삶의 길을 동시에 떠올리게 한다. 그 아득함은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지만, 언젠가는 푸른 구름도 걷히고 밝은 달빛 아래 풍류로운 술자리를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내포하는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논의한 것처럼, 해운정은 공용경과 오희맹이라는 명나라 사신의 글씨와 시가 남아있는 것 때문에 지식인 사회에 널리 이름을 알린다. 심언광이라고 하는 뛰어난 인물이 지은 정자이기도 하지만,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중원을 장악하게 되는 조선 후기가 되면 중세 문명의 회복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상징적인 공간이 된다. 이이, 정철, 김창흡 등 당대 최고의 인물들이 풍류로운 이미지로 해운정을 노래했지만, 명나라 사신과의 인연은 이후 해운정에 대한 시를 짓는 사람들의 생각에 일정한 경향성을 부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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