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금강산 유람길은 철원을 경유해서 내금강으로 들어가는 길이 애용되었다. 철원은 태봉의 터전이기도 했고 드넓은 곡창지대를 가지고 있어서 한반도의 식량을 생산하는 중요한 지역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내금강으로 가는 금강산철도가 지나가는 길목이기도 했다. 마음 아프게도 분단 이후 휴전선이 철원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바람에 우리 역사의 문화유산이 전화(戰火) 속에 무너졌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출입이 통제되어 폐허인 채로 남아있는 지역이 많다. 포천과 이웃하고 있는 철원 지역은 이름난 문인들이 오가면서 시문을 남겼고 산수 좋은 곳을 찾아 은거했던 기인일사(奇人逸士)들이 골골이 살던 곳이기도 했다.
  조선의 금성현(金城縣)은 근대 이후 강원도 김화군이 되었는데, 분단이 되면서 지금은 남북으로 갈라진 상태이다. 남쪽은 철원군 김화읍으로 그 자취가 남아있고, 북쪽은 북강원도 김화군으로 남아있다. 지금은 북쪽에 있어서 그 흔적을 밟아볼 수 없는 정자가 있다. 바로 피금정(披襟亭)이다.
  피금정은 조선 후기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18세기를 대표하는 화가 강세황(姜世晃: 1713~1791), 이인문(李寅文: 1745~1821), 김홍도(金弘道: 1745~?) 등이 모두 피금정을 그림으로 남겼다. 유려하게 굽이치는 산맥 아래로 크지 않은 강 하나가 흘러가고(남대천일 것이다), 주변으로는 민가가 몇 채 보인다. 작은 정자에 앉으면 뒤로는 우람한 산이요 주변으로는 울창한 숲이 옹위하듯 둘러있고, 강 건너편으로는 제법 넓은 들이 보인다. ‘피금(披襟)’은 옷깃을 풀어헤친다는 뜻이니, 금강산 여행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옷깃을 풀어헤치고 앉아서 작은 여유를 느끼게 해줄 만하다.
  1776년 편찬된 『금성읍지(金城邑誌)』에 의하면 피금정은 강원도 금성현 남쪽 5리 남대천변에 있다고 했다. 이곳은 금성현에서 관리하는 정자로, 금강산을 유람하기 위해 철원-김화 노정을 택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들러서 쉬어가는 곳이었다.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서 상당히 많은 시문이 지어졌는데, 이들 대부분은 피금정의 승경(勝景)과 휴식을 소재로 취하고 있다.
  피금정을 소재로 지어진 작품 중에 가장 전형적이면서도 아름다운 것이 여러 편 있는데, 그 중에서도 김익(金熤: 1723~1790)의 시가 읽을 만하다.
  김익의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광중(光仲), 호는 죽하(竹下) 또는 약현(藥峴)이다. 1763년(영조 39)에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등용되었다. 이후 응교, 세자시강원 겸 필선(世子侍講院兼弼善), 대사헌, 강화유수 등을 지낸 뒤 청나라에 사신으로 두 차례 다녀왔다. 이후 우의정, 판중추부사를 거쳐 영의정을 지냈다.
  위의 작품은 김익이 아직 과거에 급제하기 전인 1744년 금강산을 유람하는 동안 지어졌다. 젊은이답게 표현은 구체적이면서도 신선한 단어들이 사용되면서 시의 분위기를 발랄하게 만들어준다. 예컨대 경련(頸聯, 5~6구)의 경우, 가지 끝 자잘한 것은 맥락으로 보아 작은 열매 종류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표현은 한시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영조 시기 명청(明淸)시대의 소품문(小品文)이 유행하면서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남강 둑에 이르러 정자에 오른 그는 바람과 시냇물, 그늘 등으로 더운 열기를 식힌다. 가지 끝의 자잘한 것들에 눈길을 주기도 하고 골짜기 어귀에서 들리는 잔잔한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그러다가 문득 금강산이 떠올라 다시 신들메를 고쳐 신고 길을 나선다. 흰구름 무성한 저 금강산을 바라보며 가는 길이 얼마나 설렐 것인가. 젊은 선비의 기대에 찬 발걸음이 시에서 느껴지는 듯하다.
  그런가 하면 피금정의 쇠락을 안타까워하는 작품도 있다.
  19세기에 활동했던 문신인 이만용(李晩用: 1792~?)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성(汝成), 호는 동번(東樊)이다. 1858년(철종 9) 무오별시문과(戊午別試文科)에 급제한 이래 봉사(奉事), 우통례(右通禮)를 거쳐 병조참지(兵曹參知)를 역임하였다.
  금강산을 가기 위해 길을 가다가 관동 지역에 접어든 이후 처음으로 만난 정자가 피금정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정자는 비바람에 서까래는 부러지고 단청은 떨어져서 황폐하기 이를 데 없다. 답답한 느낌이 드는가 싶었는데, 문득 산이 열리면서 눈이 번쩍 뜨이는 감정을 느낀다. 산이 열린다는 표현에서 우리는 피금정이 금강산을 향해 나아가도록 힘을 주는 지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대표적인 서예가이자 문신인 윤순(尹淳: 1680~1741) 역시 피금정에서 머무르며 지친 유람길을 달랬다.
  윤순의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중화(仲和), 호는 백하(白下) 또는 학음(鶴陰)이며 만년에는 만옹(漫翁)이라는 호를 쓰기도 했다. 양명학의 태두인 정제두(鄭齊斗: 1649~1736)의 문인이며, 정제두의 아우 정제태(鄭齊泰: 1652~미상)의 사위이다. 1712년(숙종 38) 진사시에 장원급제하고, 이듬해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부수찬에 등용되었다. 이후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고, 이조참판, 대제학, 송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시서화에 모두 뛰어났는데, 특히 조선적 서법을 일으켰으니, 그의 문하에서 이광사(李匡師: 1705~1777)와 같은 명필이 나온 것도 모두 그의 노력 덕분이다.
  그의 일생은 수많은 정치적 사건으로 점철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그가 금강산을 유람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정확하게 언제 그가 금강산을 갔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의 심신이 지쳐있을 때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금강산을 향해 가는 지루한 길 도중에 피금정을 만났고, 이 정자가 주는 시원함에 매료된 듯하다. 지루함이 피금정으로 인해 흥겨움을 다시 일으키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산을 오르는 흥 때문에 종일 이곳에 있는 것도 참지 못할 지경이다. 그러니 그의 마음이 얼마나 흥분으로 차오르는지 짐작할 만하지 않은가.
  이처럼 피금정은 금강산을 향해 가든 혹은 금강산을 구경하고 고향을 향해 가든, 유람객들에게 멀고 힘들고 지루한 여정에서 한 줄기 시원한 마음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안온한 휴식의 시간을 제공하는 곳이었다. 이 정자는 근대에 들어서 새로운 길이 만들어지면서 자동차가 다니기 시작하고 금강산철도의 완성과 함께 일반인들의 금강산 기행 방식이 변화하면서 서서히 우리 기억 속에서 잊혀지게 되었다. 관동팔경의 여러 정자들은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자리하면서 여행 방식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피금정은 그 자체만으로는 사람들의 발길을 끌기에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해방과 함께 전쟁이 벌어지니 이제는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남북이 하나가 되면 피금정 자리를 찾아가서 옛사람들의 풍류를 느껴 볼 날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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