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연구원에서 조사한 오죽헌·시립박물관 자료 가운데 서원 사이의 교류를 살펴볼 수 있는 고문서 2건이 있다. 1844년(헌종 10)에 작성된 이 문서들은 병암서원(屛巖書院, 청송군)과 돈암서원(遯巖書院, 논산시)에서 매강서원(梅江書院, 구미시)으로 회신하는 통문(通文)이다.
  두 서원에서 매강서원으로 회신한 통문을 통해 현재 전해지지 않는 매강서원에서 작성한 통문의 내용을 추측할 수 있고, 매강서원이 1843년(헌종 9)에 중건된 역사적 사실과 제향하는 인물에 대해 알 수 있으며, 매강서원과 병암서원, 돈암서원 사이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매강·병암·돈암서원의 역사
  서원(書院)은 학문연구와 선현제향(先賢祭享)을 위해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으로, 주로 후손, 문인, 향인(鄕人) 등에 의하여 건립이 추진되었다. 서원 역할의 변화를 보면 고려 말에는 단순히 교육을 위해 건립하였지만 조선후기로 올수록 선현을 배향하는 역할도 하였다.
  서원에서 배향하는 인물은 서원의 아이콘(icon)이자 정치·사회·교육의 성격을 보여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제향인물을 통해 그 서원의 학문 경향 및 계통, 정치적·사회적 성격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병암서원은 이이와 김장생을 모시고 있고, 돈암서원은 김장생, 김집, 송준길, 송시열을 향사하였으며, 매강서원에서는 이이와 이우를 배향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그 당시 3곳의 서원은 서인 계통의 성향을 띄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 매강서원
  경상북도 구미시 강정4길 63-6(고아읍 예강리 257-2)에 위치한 매학정(梅鶴亭) 뒤에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매강서원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되는 터만 남아있으며, 이 터를 포함한 매학정 일원은 경상북도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다.
  매강서원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아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843년(헌종 9)에 중건하여 율곡 이이(李珥: 1536~1584)와 옥산 이우(李瑀: 1542~1609) 선생을 배향하였으며,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훼철(毁撤)되었다.

  2) 병암서원
  율곡 이이와 사계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이 병암을 다녀간 것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서원으로 경상북도 청송군 부남면 구천리 63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1702년(숙종 28)에 두 선생을 봉안하기 위해 청송도호부사 이문징(李文徵)과 지방 유림의 공의(公議)로 창건하였고, 같은 해에 ‘병암(屛巖)’이라는 이름을 사액(賜額) 받았다.
  이후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훼철되었다가 1882년(고종 19)에 청송군 청송읍 청운리로 옮겨 지었으며, 1928년에는 구평동으로 다시 이전하였다. 1974년에 김태규(金泰奎) 등으로부터 토지를 기증받았고, 1978년 이르러 부남면 홍원리 송전동에 서원을 복원하였다. 1995년에는 청송군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2006년 현재 위치에 중건(重建)하였으며, 청송군 향토 유형문화유산 제2009-2호로 지정되어있다.

  3) 돈암서원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리(임3길 26-14)에 위치한 돈암서원은 1634년(인조 12)에 창건하였고, 1659년(효종 10)에 ‘돈암(遯巖)’이라는 명칭을 사액 받았으며, 1660년(현종 1)에 재차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창건 당시 율곡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을 배향하였고, 이후 1658년(효종 9)에는 김장생의 아들인 김집(金集: 1574~1656)을 추배하였으며, 김장생·김집 부자의 제자인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을 1695년과 1699년에 차례로 모셨다.
  돈암서원은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유서 깊은 서원으로 1993년 10월 18일에 사적 제383호로 지정되었고, 2000년 1월 11일에 유경사(惟敬祠)와 돈암서원원정비(遯巖書院院庭碑)가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55호와 제366호로, 2008년 7월 10일에는 응도당(凝道堂)이 보물 제1569호로 각각 지정되었다. 2019년 7월에는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명칭으로 다른 8곳의 서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매강서원의 율곡 제사 참석요청과 병암서원·돈암서원의 응답
  ‘회문(回文)’이라고도 부르는 통문은 조선시대 민간에서 어떤 사실이나 주장을 공개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작성하는 문서이다. 통문을 작성하는 까닭은 모임을 구성하는 사람들에게 내용을 회람시키거나 타인이나 단체에게 특정한 사안에 대하여 동의 및 특정 행동에 동참하도록 요청하기 위해서이다. 통문에 작성하는 내용의 주제는 매우 다양하며, 서원·향교·문중·유생·성균관 등에서 주로 연명(連名)하는 방식으로 내용을 기재한다.
  여기에서 소개하는 병암서원과 돈암서원의 통문은 매강서원에서 제사에 참석을 요청하는 내용의 통문에 대한 회신이다. 두 문서의 작성 연도는 갑진년(甲辰年)인데, 매강서원이 중건된 시기가 계묘년인 1843년이므로 갑진년은 1844년임을 알 수 있다. 1844년 1월 15일에 작성된 병암서원의 통문은 도유사(都有司) 심휴건(沈休健), 장의(掌議) 정동진(鄭東鎮), 심술문(沈述文) 회원 정수곤(鄭壽坤) 외 34명의 이름으로 작성되었다. 내용은 병암서원에서는 서원의 형편이 영락(零落)하여 매강서원 제사에 참석인원 2명과 동전 다섯 꾸러미 밖에 보내지 못하니 너그러이 헤아려 달라는 것이다.
  돈암서원 통문은 1844년 1월 16일에 재임(齋任) 김상량(金相亮)과 이원도(李源道)가 작성하였다. 통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돈암서원에서는 매강서원의 제향에 서원을 대표하는 인물이 참석해야하지만 병고(病故)나 임기가 교체되는 등의 이유로 서재(西齋)에 있는 사람을 대신 보내게 됨을 양해해 달라는 내용이다.
  두 통문을 통해 1844년 1월 15일 이전에 매강서원에서 먼저 병암서원과 돈암서원에 제사 참석을 요청하는 통문을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통문의 작성 시기를 미루어 보면 매강서원에서 참석 요청을 한 향사는 봄(음력 2월)에 지내는 석전제(釋奠祭)로 추정된다. 1843년에 중건된 매강서원에서 1844년의 제례는 중건 이후 첫 행례이기 때문에 상당한 공을 들여 진행되었을 것이며, 율곡과 그에 정치적·학문적 성향에 궤를 같이하는 성현(聖賢)을 모신 여러 서원에 참석을 요청하는 통문을 작성하여 보낸 것으로 짐작된다. 오죽헌·시립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병암과 돈암서원의 통문은 이처럼 동시대의 서원 사이의 교유(交遊) 혹은 교류(交流)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사료이다.

  * 이 글은 강원권역한국학자료센터 역사문화콘텐츠(https://cksm.kangwon.ac.kr/)에 게재된 필자의 원고를 수정·보완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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