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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애국가 영상에 일출 장면으로 널리 알려졌던 곳이 강원특별자치도 동해시에 있는 촛대바위다. 추암(楸巖)이라고도 부르는 이 바위는 마치 촛대를 동해 바다에 꽂아놓은 듯한 모습으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주변의 기암괴석은 물론이고 거기에 부딪치는 파도가 포말로 부서지는 모습을 보노라면 장엄한 기상이 느껴지기도 한다. 촛대바위로 가기 위해 백사장이 있는 곳으로 들어서기 직전, 오래된 작은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해암정(海巖亭)이다. 이 정자는 고려 공민왕 10년(1361) 삼척심씨의 시조 심동로(沈東老, 1310~?)가 낙향하여 건립한 건물이다. 심동로의 어렸을 때 이름은 한(漢)이요, 호는 신재(信齋)이다. 1342년 생진과에 급제하여 직한림원사(直翰林院事) 판성균관학록(判成均館學錄), 판밀직당후관(判密直堂后官), 승봉랑(承奉郞) 통례문지후(通禮門祗侯) 등을 역임한 뒤 늙은 부모님을 모시기 위하여 지방 수령을 자청해서 통주사(通州使)로 부임했다. 그는 늘 청렴하고 공명정대한 업무 처리와 간편한 행정 절차로 백성의 신임을 얻었다고 한다. 이후 여러 고관을 지낸 뒤 삼척으로 돌아가려 하자 공민왕이 여러 차례 만류하였지만 뜻을 껐지 못했다. 이에 왕은 그에게 ‘동쪽으로 가는 노인’이라는 뜻의 ‘동로(東老)’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진주군(眞珠君)에 봉하였다. 언젠가 한 번은 이색(李穡, 1328~1396)이 학사승지(學士丞旨, 고려 때의 대제학에 해당함)에 임명되었는데, 심동로의 나이가 자신보다 많고 덕이 높기 때문에 벼슬을 양보했다고 한다. 이지렴(李之濂, 1628~1691)이 쓴 어촌(漁村) 심언광(沈彦光, 1487~1540)의 행장에 소개된 일화다. 물론 이 이야기는 안축(安軸, 1287~1348)의 아들인 안종원(安宗源, 1325~1394)의 일화로 기록되어 있는 경우가 더 많기는 하다. 어떻든 심동로는 당시 많은 나이에도 낮은 품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덕이 높아 주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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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남아있는 해암정(海岩亭)은 심동로가 건립했던 원래의 건물이 소실된 후 조선 중종 25년(1530)에 그의 후손 심언광이 강원도관찰사로 있을 때 중건하고, 정조 18년(1794) 다시 중수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주변에 여러 건물과 주차장이 들어서서 원래의 분위기를 느끼기가 쉽지 않지만, 건물의 졸박(拙朴)함은 바로 앞에 위치한 능파대의 기암괴석과 거기에 부딪치는 파도의 동적인 이미지와 대비를 이루면서 멋진 풍광을 조성하고 있다. 해암정은 추암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삼척도호부」항목에 의하면 추암은 능파대(凌波臺)를 지칭하는 것으로, 한명회(韓明澮, 1415~1487)가 강원도체찰사로 이곳에 들렀을 때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동해 일출이 장관이라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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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회는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책사 유형의 인물이다. 드라마로 제작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만큼 그의 인생은 드라마틱한 데가 있다. 그가 강원도 동해안 지역을 여행하면서 몇 가지 일화를 남기면서 지명 전설로 남은 곳이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시중대(侍中臺)다. 관동팔경에 넣기도 하고 빼기도 하는 곳인데, 지금은 북강원도 지역에 있어서 가볼 수 없는 명소다. 총석정으로 유명한 통천군을 지나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 곳이 일명 시중호(侍中湖)이고, 거기에 있던 누대가 바로 시중대다. 한명회가 일찍이 강원감사가 되어 이곳을 들렀을 때 마침 찬성(贊成) 벼슬에 제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이곳을 시중대라고 명명했다는 이야기가 여러 문헌에 기록되어 전한다. 능파대는 해암정을 지나 바닷가로 가면 촛대바위가 있는 부근으로, 기암괴석이 줄지어 있는 곳이다. 그 꼭대기에 사람들이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한명회가 이곳에 들렀다가 능파대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조선 후기 문인 이의숙(李義肅, ?~1807)이 지은 「능파대기(凌波臺記)」에는 기암괴석 사이로 바람이 스치면서 내는 소리와 파도가 치면서 우레 같은 소리를 내는 장엄한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동해의 거센 파도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라는 글자의 의미가 있지만, 한명회는 기존의 ‘추암’이라는 이름이 속되기 때문에 능파대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자연에 대해 부끄럽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는 말도 전한다. 어떻든 위치상으로 보면 해암정은 동해를 향해 있는 능파대 뒤쪽 백사장 가에 지어놓은 정자인 셈이다. 이곳이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유생들 사이에 명소가 된 것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귀양을 가던 도중 들러서 시와 글씨를 남겼기 때문이다. 현판 중에서 ‘海巖亭’이라고 쓴 해서체 글씨가 바로 송시열의 것이다. 최근 강릉원주대학교의 이상균 교수는 이 글씨조차도 송시열이 들러서 쓴 것이라기보다는 심동로의 후손이 받아와서 걸어놓은 것이라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필자 역시 『강원의 누정 문화』(강원도사편찬위원회, 2021)에서 해암정을 다룰 때 심동로가 지은 한시 작품이라고 하면서 칠언절구 두 편을 소개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잘못된 것이므로, 이번 기회에 바로 잡고자 한다. 그 작품은 다음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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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앞의 작품은 인터넷 상에서 우암 송시열이 귀양을 가던 도중 해암정에 들러서 쓴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에도 정확한 전거나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 누군가가 송시열과 관련해서 떠도는 이야기를 글에 쓰는 바람에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는 위의 두 작품이 심동로가 지은 것이라고도 주장한다. 필자 역시 그렇게 소개했는데, 이는 잘못된 서술이었다. 어디에도 이 작품이 심동로의 것이라는 기록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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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최근 발표된 이상균 교수의 논문에서도 같은 의견으로 서술되어 있다. 더욱이 두 번째 작품은 심동로의 것이 아니라 고려 후기 김구용(金九容, 1338~1384)이 지었다. 그의 문집인『척약재집(惕若齋集)』(卷上)에는 『삼척심중서이시견기차운봉정(三陟沈中書以詩見寄次韻奉呈)』이라는 제목으로 두 수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첫 번째 수가 바로 이것이다. 삼척 심중서에게 시를 부치면서 그의 작품에 차운했다는 뜻이니, 김구용이 사계의 어른인 심동로에게 존경의 마음을 담아서 차운한 시를 보냈던 것이다. 시 중에서는 아무래도 두 번째 작품이 중요하다. 심동로와 같은 시대를 보낸 문인이 심동로의 시에 차운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원래의 시는 전하지 않지만 심동로의 삶의 태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바닷가에서 갈매기와 함께 늙어가겠다는 것은 망기(忘機) 고사를 빌려서 심동로가 속세에 대한 욕심을 완전히 잊고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살아간다는 점을 서술한 것이다. 『열자(列子)』에는 바닷가에서 매일 갈매기와 함께 노니는 사람 이야기가 나온다. 하루는 그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네가 매일 갈매기와 노닐고 있으니, 오늘 갈매기를 잡아와서 나와 함께 놀자.”라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아들이 바닷가로 나갔더니 매일 같이 어울리던 갈매기가 한 마리도 가까이 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세상에 대한 욕망을 일으키는 마음(이것을 ‘機心’이라고 한다)을 잊어버리고 살 때는 갈매기와 함께 노닐 수 있었지만, 기심이 생기는 순간 갈매기와는 노닐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김구용은 심동로가 바로 망기(忘機)의 경지에서 노니는 곳이 해암정이라고 본 것이다. 세상의 부귀공명을 부질없는 것으로 여기면서 평생토록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에 연연치 않았던 그의 삶을 칭찬하고 있다.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 세상의 부귀공명을 던져버리고 동해 바닷가에서 자연과 물아일체(物我一體)가 되어 살아가는 모습이야말로 김구용이 꿈꾸는 최고의 경지였을 것이다. 이후 해암정보다는 능파대가 명소로 떠오르며 문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성현(成俔, 1439~1504), 신흠(申欽, 1566~1628), 이식(李植, 1584~1647), 이민구(李敏求, 1589~1670), 허목(許穆, 1595~1682), 채제공(蔡濟恭, 1720~1799) 등 당대 최고의 문인들이 능파대를 소재로 시문을 남겼다. 그러나 능파대로 가기 전에 만나는 해암정, 그 정자에 깃든 심동로의 삶이야말로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가 배워야 할 자세가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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