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고래가 미역을 좋아한다고? 물개가 지누아리를 즐긴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고래와 미역 이야기는 금시초문, 이 사실을 확인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
![]() |
중국 당나라 ‘초학기’에 실린 내용이다. 또한 조선 실학자 이규경은 “어떤 사람이 헤엄치다 막 새끼를 낳은 고래에게 먹혀 배 속에 들어갔더니 그 안에 미역이 가득 붙어 있었으며 악혈이 모두 물로 변해 있었다. 고래 배 속에서 겨우 빠져나와 미역이 산후 조리하는 데 효험이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렸다.”라는 다소 의심스러운 기록을 남겼다. 1912년 울산 장생포에 와서 귀신고래를 연구한 미국인 동물학자 앤드류스(Andrews)는 귀신고래 배 속을 보니 미역이 들어 있더라며 ‘고래 배 속에서 젤라틴 상태의 물질들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는 이규경을 비롯한 앞선 고문헌의 기록을 뒷받침하는 연구이다. 우리 민족에게 미역에 대한 믿음은 기록의 진실, 과학적 분석 등을 따지기 앞서 절대적이다. 미역은 어머니가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하루라도 빨리 몸을 회복하기 위한 신약(神藥)으로 믿어왔던 것이다. |
![]() |
![]() |
이렇게 좋은 미역이 인간의 손아귀를 벗어난 바닷속에서 자란다. 인간의 채집 능력 밖이다. 바다를 삶의 일부로 끌어들이기 위한 인간의 욕심은 떼배를 통해 드러난다. 엉성하게 오동나무를 이어 붙인 떼배는 물 위에서 떠서 인간의 욕심을 충족시켰고, 오랫동안 세월이 바뀌어도 끝나지 않은 현재 진행형이다. ‘배’라면 물이 새어 들어오는 공간이 없어야 하는데 떼배는 사방이 터져있어 뗏목처럼 보인다. 강릉을 비롯한 동해안 일원에서 여전히 본래 모습을 간직하고 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주로 미역 채취 작업에 사용하는 떼배는 물에 잘 떠야 하는 만큼, 바닥은 가볍고 속이 빈 오동나무로 만든다. 길이 3m 이상, 직경 20~30cm인 오동나무를 잘라 그늘에서 2~3년간 말려야 가벼워진다. 이것을 7~8개 이어 붙여야 한다. 기대 수명으로 10년을 본다. 떼배는 통상 길이가 310㎝ 정도이며 폭은 130㎝ 크기의 뗏목형으로, 끄트머리에 노가 달려 있다. 떼배는 딱 봐도 오랜 역사성이 묻어난다. 아무리 현대적 수식어를 붙여 설명한다 한들 결국 옛것이라는 데서 벗어나지 못한다. 돛이나 다른 동력을 이용하지 않고 순전히 사람의 힘으로 노를 저어 움직이는 원시성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현존하는 가장 원시적인 배이다. 삼국시대, 이사부가 강릉에서 배를 건조해 울릉도를 정벌한 기록으로 보아 해안에는 떼배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
![]() |
물에 뜰 것을 만들어 바다를 누비고 다닌 인간의 용기는 지금도 가상하지만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배는 늘 외롭고 고독한 존재였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배 중에 ‘반달’로 상징되는 배가 있다.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바람을 이용하는 돛대도 없고, 추진력을 얻는 긴 장대인 삿대도 없이 넓고 긴 은하수를 건너는 반달은 최첨단 AI(artificial intelligence) 시스템을 갖춘 배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은하수를 떠다니는 반달을 그리면서 꿈과 희망이라는 코드를 읽으려고 노력하지만 가슴 속에 잔존하는 아린 맛은 여전하다. 동해안 푸른 바다에 홀로 떠 있는 떼배 역시 ‘반달배’와 다를 것이 없다. 검푸른 바다에서 파도 끝에 일렁이며 삶을 건져내는 떼배는 늘 외롭다. 한국사진작가협회 삼척지부 회원 전시회에 참여한 사진작가 박태수의 작품 ‘떼배’는 인간과 바다의 관계를 보여주는 실증이다.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이 떼배에 몸을 맡기고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데 부인은 뒤쪽에 다소곳이 앉아있고 남편은 열심히 노를 젖고 있다. 방향으로 보아 월미도 인근 갯바위에서 작업을 마치고 뭍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보인다. 섬이 대해를 가려 평화로운 모습을 연출하고 있지만 가슴 저린 애틋함을 벗어나기 힘들다. 밀레의 만종, 동해안 나릿가 버전이다. |
![]() |
![]() |
이제는 바다에 떠있는 떼배를 보는 것은 행운이 따라야 한다. 동해안 나릿가에서 떼배를 볼 수 있는 시간은 미역을 채취하는 4월 ~ 5월 봄철 한때, 잠깐이다. 단위가 큰 어촌계는 미역채취를 시기를 잡아 공동작업으로 시행한다. 떼배보다는 전마선(소형어선)을 이용하며 계원들이 급속히 늘었지만 소규모 어촌에서는 떼배가 아직 유용하다. 떼배는 원하는 시기에 소수 인원으로 작업이 가능하기 때문에 효용성이 유지되는 것이다. 떼배나 전마선을 타고 창경으로 바닷속을 들여다보며 낫대로 미역을 채취하는 작업을 ‘창경바리’라고 한다. 새벽밥 먹고 떼배를 띄우는 어민들은 미역을 찾는 창경(창경은 사다리꼴 사각통에 유리를 붙여 만든 일종의 수경)과 미역을 채취할 때 사용하는 긴 장대에 낫을 연결한 ‘낫대’를 준비한다. 잔잔한 바닷가에서 평소 봐 두었던 짬(바닷속 바위)을 찾아 창경으로 바닷속을 살피고, 미역을 낫대로 베어내고 건져 올린다. 미역 채취는 해뜨기 전부터 불과 서너 시간이다. 이 시간대가 파도도 잔잔하고 바닷물의 흐름 즉, 물때도 좋기 때문이다. 창경이 없을 때는 생선 기름(어고·魚膏)을 사용했다. 물고기 간을 끓여서 기름을 내고 떼배를 바다에 띄우고 조업을 시작할 때면 준비한 기름을 물 위에 뿌렸다. 기름은 창경의 유리 역할을 충실히 해 바닷속을 샅샅이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 홍양호(1724~1802년)는 “다시마와 미역은 바다 가운데의 암초에서 나니, 매년 3, 4월에 채취하는데, 배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로 나아가 수면에 생선 기름을 뿌려 물밑이 보이게 한 후 장대로 거두어들인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는 유리가 등장하기 전, 창경바리의 시원이라고 할 수 있다. |
![]() |
강릉시는 지난 6월에 ‘창경바리 조업’를 국가중요어업유산으로 지정하는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경남 통영시는 견내량 해역에서 어민들이 ‘트릿대’를 이용해 돌미역을 채취하는 전통 어업 활동을 제8호 국가중요어업유산으로 만들었다. 트릿대는 7, 8m짜리 장대로 아래쪽 끝으로 미역을 감아올리는 도구이다. 경북 울진군에서도 '돌미역 떼배 채취어업'을 환경친화적인 전통 방식으로 돌미역을 채취하는 문화자산으로서, 역사성, 생태계 보호 등을 이유로 내세워 제9호 국가중요어업유산으로 지정 받았다. 이제 강릉 차례이다. 과학을 앞세운 현대문명은 우리의 삶 속에서 바꿀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바꿨다. 하지만 떼배는 지독한 고독을 가슴에 품고 홀로 아리랑을 부르며 긴 세월 바다를 지키고 있다. |
![]() |
![]() |
![]() |